하얀언어

이성친구

신아나키스트 2009. 9. 19. 22:20

 

수 년 전 내가 첫 P.C통신 동우회를 접할 시기에 지역카페의
한 여자회원을 아내에게 소개시켜준 적이 있었다.
방송국에서 음악 방송일을 하다가 같은 방송국 기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아내와 그녀는 첫 만날때부터 호흡이 척척 가슴이 찰싹 들어 맞앗다.
새벽까지 술 마시며 쫑알대는 그네들의 어울림은 여느 선한 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건강해 보였다.


아내는 그 친구를 남편의 여자친구로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자기보다 여섯살 많은 그녀를 언니 언니하며 반찬이랑 참기름을
나눠주는걸 보면 마누라도 이젠 내 가슴 만큼이나 투명한 모양이다.
틈틈이 그 언니 여동생과 셋이서 점심을 먹고, 자기들끼리만 또 다른
카페를 만들어 벙개를 때리는 모습들이 이쁘게 들어온다.


아직도 둘이서 얼마나 친하게 지내는지 이젠 아예, 나를 왕따시키고
그쪽식구들하고만 뻔질나게 어울리는 모습이 꼭 자매를 보는것 같다.
그 친구 가족들과 몇 일 동안 여행지에서 즐겁게 보냈던 시간들은
좋은 추억으로 자리잡기에 충분했다.


하지만,우리사회엔 아직도 "이성친구"에 대해 관대한 사람은 드물다.
아니,그 본질을 원천적으로 부정한다. 만약 내가 도덕적으로 견고한
여자친구와 커피를 마시다 통속적인 색안경들에게 포착되면 여지없이
"애인"으로 도매끔 처리 돼 버리는게 분명한 현실이다.
어쩌다가 우연히 "성"이 다른 친구를 만나면 지례 겁을 먹고 두려워서
주변부터 휘둘러 보는 것이 기혼 남.녀들의 속성이 되버렸다.


그런데,솔직하게 되짚어 보자.
이세상에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배우자의 유.무를 떠나서 멋있고
아름다운 친구, 생각만 해도 행복이 묻어나는 이상적인 이성친구에 대한
상상과 바램을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이 과연 몇 % 나 될까?
나와 나의 아내,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심정적으로 좋은 이성친구가
생겼으면 참 좋겠다 라는 바램을 포기하며 살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나 역시 아직껏 평생,여자친구가 생기지 않을꺼라는 무기력한 가상을
인정하며 살지도 않았다.


어느 문인이 "인간은 호기심이 없어지는 순간부터 늙어간다" 라고
표현했듯이 우리의 심리상태 저변에는 현실적 가능성은 없을 지 라도
"호기심"과 "신선한 대상"에 대한 사춘기빛 감성을 황폐화시키지 않고
가슴에 묻으며 살아 간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감성의 근원이며
살아있다는 증거라면 욕된 비약일까?


" 아니다! 아니다! 나는 고매해서 이성친구따위의 불순한 인간관계는
꿈도 꾸지 않는다" 우엨~~ .... 하며 손사례를 짓지만 그 손사래짓이
크면 클수록 그사람은 자신의 진실함에 자신이 없어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교적 솔직하고 올곧은 편이 돼놔서,나 자신을 속이는데
익숙치 못하다. 내 아내한테도 건강한 이성친구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
시키며 권해 볼 때가 있다.


하지만, 순수한 영혼조차 사그라져버린 빈껍데기 속물들한테는
위험천만한 주문일 수 밖에 없다.
원초적인 감성에만 의존한 채 상대를 성적대상으로 보는 속물들에게
어떻게 이성친구니,우정이니 하는 사치스러운 말을 흘릴 수 있겠는가?
아가페적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인격에게 "우정"을 논한다는 자체가
환상이요 위선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혹자는, 진실한 이성친구의 존재를 불가사의하다며 불가론을 편다.
이런 진부한 담론에 동의하고 싶진 않지만 사실은 대단히 정통한
이야기다. 사실 내가 이런 글을 쓰면서도 서로간에 상당한 노력과
비숫한 정서 없이는 "친구"라는 좋은 작품은 그르칠 수 있다는 긴장에서
헤어나기가 어렵다.


시나브로 우리사회도 의.식.주 해결의 기초생활에서 벗어나 인문.사회학
의 심층부까지 까발리고 고민하는 수준에 이른건 사실이지만, 아직도
이성친구라는 인간관계를 제도권으로 끌어들이는 데는 상당한 부담이
뒤따르고 요원한 것이 현실이다.
정녕, 아름다움이 아름답지 않고, 친구가 친구같지 않는데도 상식의
울타리에 억지로 담아두려는 시도는 위험한 발상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건강한 "이성친구는 가정과 사회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언더라인에서의 투명하지 못한 칙칙한 어울림들을 뛰어 넘어
건전한 삶의 양념과 향수로 삼을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도 있는 것이다.
사교철학의 마지노라인 조차 설정되지 않은 시선과 환청앞에 더 이상
정체되거나 오염되는 우를 범하지 않으며 정도를 걸을 수 있다면
싸구려 색안경의 수요는 서서히 줄어들지 않나 하는 멍청한 생각을
해본다.

 

2006.9.25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