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언어
지렁이
신아나키스트
2009. 9. 20. 15:36
마른 장마가 땅속을 데운 탓일까?
시원한 물기 한 모금 축이려 불쑥 삐져나온 곳이 불지옥 일줄이야.
7월 땡볕 오후 세시 반..
회사 화단 옆 보도블럭 위 데글 데글 비비꼬는 생명체 하나.
중간 크기의 지렁이다.
온 몸에 모래바르고 이글거리는 뙤약볕 아래 장작처럼 말라간다.
애처로워 할 겨를이 없다.
얼른 나뭇잎을 주어 비툴비툴 각진 몸통을 걷어 올려 그늘진 화단 흙 위에
내려 놓았다.
곧 바로 화장실로 뛰어들어 물 한 컵을 가져다 쏟아 부었다.
굳었던 몸뚱아리가 힘겹게 사르르~ 녹아난다.
다시 한 컵 가져다 부었다.
제법 S라인을 뽑내며 초보 수준에 뱀 수영을 한다.
손가락으로 흙을 눌러보니 지 집을 찾을 거 같은 폭실함이 느껴진다.
보너스로 물 한 컵 더 붓고 손을 털었다.
그리곤 자판기 커피를 한 잔 뽑았다.
이열치열..
뜨끈한 커피맛이 이리 좋았던가?
"지렁아~ 너도 한방울 마실래?" 눈짓하니
설레설레 머리를 흔든다. 꼬랑지도 힘차게 흔든다.
이제 살만한갑보다. ^ ^*
퇴근길에 쪼그리고 앉아 그 자릴 살펴보니
지렁인 이미 잠수해 온데간데없고 물기만 촉촉히 남아 있다.
흔적없는 인사법이 이렇게 고울줄이야.
2008.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