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언어

발가벗긴 고양이

신아나키스트 2009. 9. 21. 12:19

 



저녁 퇴근 무렵이었다.
바깥공기가 시끌벅적한 것이 무슨 볼거리가 생긴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창밖을 내다보니 노오란 색상의 요상한 물체가 비틀거리다 쓰러지고
또 다시 비틀거리다 꼬꾸라진다.
참 이상한 놈도 있다 싶어 자세히 살펴보니 노란색 페인트를
뒤집어 쓴 고양이의 처절한 몸부림 이였다.

 

 

내용인 즉, 회사 식당 주변에 서식하는 들 고양이 한마리가
공사장 내 대형 페인트 통을 음식 찌꺼기 통으로 잘 못 알고 뛰어들었다가
페인트 속으로 풍덩 빨려들고 만 것이다.
용케도 뛰쳐나오긴 했지만 온 몸은 그야말로 진한 노란색 그 자체였고
그날따라 햇빛이 쨍하게 내린 터라 고양이의 온 몸은 바싹 바싹 마르면서
굳어져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고양이의 털과 근육은 갑옷과 같이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고 피부 호흡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허둥대어 봤지만 몇 발짝 가다 넘어지고, 또 쓰러지는 모습이 너무도
애처로웠다. 눈빛은 이미 죽음에 이른 듯 하얗게 풀려 있었고
어떻게 손 써 보려 해도 맹수와 같은 야성이 있어서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저항하는 통에 함부로 손 쓸 수도 없는 상황 이였다.


 

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비록 들짐승에 불과 하지만 한 주체적 생명이
자연스럽지 못하게 내 눈앞에서 꼼짝없이 죽어가는 모양은 그리

예사롭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은 그 모양을 즐기고만 있을 뿐.
그렇다고 내가 당장 어떻게 손을 써서 살릴 수 있는 뚜렷한 대책도 없었다.


 

시너로 씻겨볼까?
아니야, 그러면 더욱 치명상을 받고 곧바로 죽을 수가 있어.
머리 깎는 기계가 있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는데...
아예 마취를 시키고 온 몸을 면도 해 버려?
이리저리 궁리를 하는데 누가 옆에서 수성 페인트라는 얘기를 해 주기에
혹시 씻겨 내릴까 싶어 강력한 공업용 펌프 호수로 물을 뿌려 봤지만
허사였다. 페인트는 이미 완전히 말라서 단단히 굳어져 버렸고 고양이는
옆으로 쓰러진 채 거친 호흡을 하면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퇴근 시간은 다 되고 정말 난처하기만 하였다.

 


119로 연락을 하면 와 줄려나. "에이 욕만 쳐 듣겠지... "
혹시 울산에 야생동물 보호 협회가 있는가 싶어 전화번호 안내 책을
뒤져봤지만 그것도 없었다.
"어쩔 수가 없어, 너의 운명은 비참하게 죽을 수밖에 없고 가장
흉측하게 고통 받으며 서서히 죽을 수밖에 없는 거야. 바보 같은 짜식... "

그 날 저녁은 그렇게 고양이의 죽음을 뒤로 한 채 답답한 가슴을 안고
그냥 퇴근하고 말았다.
퇴근하면서도 그렇고 집에 와서도 그 놈의 고양이에 대한 환상은
지워지지 않는다. 나의 무능력과 무성의로 운 나쁜 고양이가 꼼짝없이
죽는다고 생각하니 너무도 마음이 심란하였다.


 

어김없이 돌아온 다음날 아침.
99% 죽어 있을 고양이를 생각하니 출근길이 무겁기만 하고

회사에 들어서고도 고양이의 죽음을 확인하기 싫었다.
버림받은 시체, 따스한 데라도 묻어줘야지 마음먹고 어제 나뒹굴었던
그 자리로 가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고양이는 완전히 굳어진 채
머리를 땅에 쳐 받고 가엾게 죽어 있었다. 그 모양이 얼마나 흉측스럽던지
꼭 노란 페인트칠한 거친 나무토막 같았다.


 

밤새도록 피부 호흡조차 못해서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어 갔을까
생각하니 동네사람 세상뜬것 만큼이나 가슴이 아팠다.
나 때문이라 자책하면서 죽음을 확인하려고 주둥이를 톡 건드려 봤다.
어! 그런데 이게 웬 질긴 목숨이란 말인가.
전날 초저녁쯤에 이미 죽은 줄 알았던 그 놈이 주둥이를 살그머니
움직이는 것 아닌가. 미미한 움직임 이였지만 그 때는 정말 큰 움직임으로
보였다. 순간 나는 희망과 가능성에 대한 기대로 가슴이 벅차올랐다.
흥분된 마음에 곧바로 사무실로 달려와 장갑을 끼고 식당에서 가위를
빌려와 털을 자르기 시작했다.


 

죽은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몸에 손을 대도 꿈쩍 안 했고, 털은 완전히
페인트로 코팅되어 뻣뻣하게 덩어리져 있어서 가위질을 할 수가 없었다.
몇 가닥 조금씩 자르다가 이렇게 해서는 효과가 없겠다 싶어, 아예 털을
몽땅 뽑아 버리면 어떨까 하고 단단하게 굳은 털 뭉치를 힘껏 당겨 봤다.
신기하게도 잡은 만큼 통째로 뽑혀 나왔다. 페인트가 본드 역할을 해서
서로 단단하게 부착된 때문이지 한 뭉큼씩 쉽게 떼어낼 수가 있었다.
한 세 번 정도 뽑았을까?
그때까지 축 늘어졌던 고양이가 애기 손바닥 넓이만큼 털을 뽑으니
등가죽이 살짝 꿈틀거리기 시작한다.
피부호흡이 가능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어쩌면 살릴 수도 있다는 희망에
뽑고 또 뽑고 북북 박박 무지하게 뽑아 벗겼다.
등부터 시작해서 배, 다리, 꼬리, 머리의 잔털...
아무튼 콧수염하고 이빨만 빼고는 그냥 홀라당 벗겨 버렸다.


 

가죽 살만 덩그러이 남은 그 모양이 어찌나 우습고 징그러운지 한 마디로
가관 이였다. 털이 벗겨지는 넓이가 넓을수록 고양이의 꿈틀거리는 속도는
빨라졌고 나중에는 발로 차는 저력까지 보여주었다.
보통의 고양이 같으면 발버둥치고 "냐옹"거리며 난리굿을 쳤겠지만
그놈도 자기를 살리려고 이 짓 꺼릴 하는걸 아는지 고통스러워도 가만히
있어 주었다. 아니 아직은 아픔을 느낄만한 상태가 아닌 것 같았다.


 

배 밑 부분을 뽑았을 때야 그 놈이 숫놈 이라는 걸 알았다.
생식기 입구가 털과 페인트로 봉쇄되어 있어서 그 곳을 뽑고 나서야
비로소 오줌을 누기 시작했고 눈동자도 약간 까맣게 돌아오기 시작하였다.
노란색 털을 완전히 벗기니 불그스름하면서도 하얀 살이 드리워졌다.
체온 유지를 위해 옷가지를 덮어 주고 기력을 회복하라고 물이랑 삶은
멸치를 갖다 줬지만 사경을 헤매던 터라 아직 무엇을 먹기에는 역부족
이였다. 숨은 열심히 쉬고 있었지만 탈진 상태가 심하여 강제로라도
먹이지 않으면 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억지로 입을 벌리고
미지근한 물을 주입시켰다. 복부 마사지까지 해가며 물 먹이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나니 점차 꿈틀거림이 커지면서 일어서려고 안간힘을 써본다.


 

모두가 다 죽을 것이라고 여겼던 한 미물이 살아나는 순간 이였다.

털을 뽑을 때는 구경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고
이사님은 잡아먹으려 하는 줄 알았다며 살려내면 수의사 자격증을 주겠노라

농까지 한다.
과연 살릴 수 있을까? 하지만 이제는 괜찮다. 최선을 다 했으니까...
그놈도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곱게 죽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다음날 아침엔 궁금증과 기대를 안고 편안한 마음으로 출근을 했다.
있을지 없을지?
살아있을까 죽었을까...

 

나의 별스러운 처방에 하늘이 도왔는지 벌거벗긴 고양이는
제자리를 훌훌 털고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살아나서 도망간 것이다.
순간 내 가슴 속에는 뭔가 말할 수 없는 기쁨과 보람, 성취감들이
파도같이 밀려든다.
그제야 비로소 모든 현상들이 자연스럽게 보였다.
비록 나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도둑고양이에 불과하지만
고귀한 생명의 죽음을 방관 하는 것은 죽임을 시키는 거나 똑같다는
죄의식에서 한결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다.


 

나중에 회사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 날 저녁 갖다 준 밥 한 그릇에
멸치하고 물 한 그릇을 깨끗이 먹어치우곤 어디론지 사라지더란다.
비틀거리며 걸어갔는지, 아니면 씩씩하게 뛰어 갔는진 모르겠지만
분명 지어미 자궁에서 뛰쳐나와 첫걸음을 배울 때 보다 힘찼을 것이다.
지금쯤 어딘가에서 끈끈하게 살아가고 있을 '발가벗긴 고양이'가
제 명대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다음 계절이 두 번 바뀔 때 즈음 짙은 회색빛 옷으로 곱게 갈아입고
눈이나 한번 맞추러 와 줬으면 좋겠다.

 
 
2006.8.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