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언어

실밥

신아나키스트 2009. 10. 27. 20:41

 

벗을 때의 쾌감을 아는 사람은 샤워도 즐겁게 한다.

그리고 거울과의 상견례를 즐긴다.

샤워를 마친 거울 속 남자는 습관적으로 자신의 몸을 훑어본다.

그리고는 스스로의 몸에 점수를 매긴다.

자기 멋대로의 후한 점수를 받은 남자는 샤워후의 시원함보다도

나르시시즘에 빠져 한참 동안 흐뭇함에 젖어있다.

대체적으로 끄덕 뜨덕..

샤워후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다.

 

오늘도 여느때와 똑같이 자신의 몸과 대화를 시도하는 남자.

거울에서 눈을 떼고 아래를 내다보는데..

엉' 요게 뭘까??..

눈에 들어오는 까만 점 하나.

설마 고추에 기미? 

거시기를 땡기고 고개를 숙여 그 정체를 뒤진다.

빙 둘러친 고래잡이의 흉터..

그 사이 속살에 낀 걸로 봐서 이건 분명 실밥임에 틀림없다.

해병대 제대 말년시절 후루꾸 위생병에게 덥썩 몸을 맡겨버린 훈장이다.

외과의사 만큼 야무지게 꿰맸는줄 알았는데 실밥 제거를 제대로 안한 모양이다.

26년 동안 소임을 다하고 잠자다가 이제 속살 밖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내민것이다.

 

지체없이 제거 작업에 들어갔다.

두 엄지 손톱으로 그 놈을 압박하면서 꼬옥 누르니 신기하게도 쏘옥히 솟아오른다.

까만 참깨 반 정도 크기의 납작한 실밥이 실체를 드러냈다.

가엾기도 하고 고약하기도 하고 화가나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그 오랜 세월동안 얼마나 답답하고 즐겁고 뜨겁고 멀미했을까?

나의 비밀을 다 알아버린 너.

도대체 너의 정체는 뭐냐.

낚시줄이냐?

수술용 실이냐?

아님 지천을 맴도는 총각 귀신의 혼이더냐?

지금껏 나의 은밀한 행복과 쾌감에 무임승차한 이 놈의 실밥은 어쩌면 일부러 은둔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흐르는 수돗물에 살며시 날려보냈다.

잘가라 .

행복한 놈..

 

근데 겨우 실밥하나를 뺏는데 뭔가 허전하다.

아직 장마비가 제대로 덥치지 않았는데 가슴이 젖어온다.

나도 실밥이고 싶어진다.

염치없는 그 생명력. 

감성 빼앗기지 않은 은근한 저 에너지.

이십년 삼십년.. 

날마다 실밥이고 싶다.

너의 관음증에 다가서고 프다. 

 

 

 

2009.6.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