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언어

아이스크림이 고팠나?

신아나키스트 2019. 9. 4. 15:09

 

잠시 눈을 붙였을까.

끼이익 문 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을 열고 들어오는 아내의 그림자엔 아이스크림 같은 차갑고 달콤한

공기가 베어 있는듯하다.

남편이 잠에서 깨지 않도록 살며시 욕실로 들어가는 그녀의 배려로 봐선

그다지 술을 많이 마신 거 같진 않다.

 

다시 눈을 감았다.

자는척하며 여러 상황을 헤아려본다.

샤워하는 아내의 물소리가 몇시간 전 아내가 밖에서 샤워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 이르자 이내 내 몸을 두갈래 뜨거움으로 치닫는다.

 

질투와 욕망..

참 이상도하다.

그 질투와 나의 욕망사이에서 순서를 잡기가 힘들 만큼 내 몸이

뜨거워져가니 말이다.

"빌어먹을..."

"일렁이는 질투보다 먹다 남은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고 싶은게냐?"

솟구치는 갈증과 조작된 소설...

이 두 기운이 부딕치면 어느쪽이 이길까?

 

아내를 사랑해준 그 남자가 누구일까(일방적 상상)에 빠져들 헛발질을

건너 뛰고 난 결국 새벽에 아이스크림을 먹고 말았다.

허기진 노숙자 마냥 아이스크림을 녹여 마실 새도 없이 덥썩 한숨에

집어 삼켰다.

미친듯한 사랑은 장대비가 그친 것 처럼 그날 아침을 미소짓는 일상으로

되돌려 놓았다.

물어보지 않았다.

스스로 긍금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아내의 편안한 외출과 길어진 술자리에 대해 쪼잔한

물음을 던지는건 나의 세계관을 부정하는 것이기에 그렇다.

주체적 인격이 새벽까지 친구들과 술잔 기울이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라서

더욱 그렇다.

 

나도 가끔은 파격적인 꿈을 꾸지 않았던가.

나 혼자만의 목적지 없는 사오일 정도의 여행길..

그 섹션 하나.

/정동진 바닷가를 거닐다 나와 똑같은 허기진 감성과 가을언어를 가진

중년 여인과 마추친다.

그냥 아무 말없이 어께 나란히 하고 해변을 걷는다.

그리고는 소금끼 내리는 횟집 난간에 앉아 새벽까지 술 잔 부딕친다../

시간과 현실의 벽을 부수고 달빛에서부터 4차원의 안주꺼리들까지

싹쓸이 씹어 삼키는 맛깔스러운 꿈.

그런 꿈을 계절이 바뀔 때마다 꾸지 않았던가.

 

어느 가을 남자가 나보다 더 철없는 꿈을 꿀진 모르나

나의 생뚱한 꿈과 외출한 아내가 새벽에 들어온 거와 뭐가 다른가?

새벽, 대화, 술, 벗. 낭만, 하얀영혼, 교감....

아이스크림을 포함해서 어쩌면 내가 더 아내보다 원초적인 감성에

노출되어 있는건 아닐까.

아직 가을은 제대로된 옷을 입지도 않았는데 참 걱정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