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언어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신아나키스트 2009. 9. 15. 22:09

 

며칠전 조문갔다 돌아오는 길.
울산 동강병원 앞 버스정류소 벤치에서, 전봇대 불빛으로 책속에 빠져있던
썩 괜찮은 외국여자...
지나가는 누군가를 느낌으로 알고,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어 환한 미소를
던져주던(나와 동시에) 그녀의 인사법이 나를 기쁘게 한다.

재학시절 일요일 그 어느날.
캠퍼스 내에서 노모와 팔짱끼고 교정을 거니는 노처녀 교수의 은은한
효심과,소담거리며 나아가는 두 모녀의 아름다운 뒷모습은 고향집
바닷가를 붉게 물들였던 낙조의 찬란함보다 더 나를 눈부시게 한다.

십수년전 장대비가 쏟아지던 날.
버스에서 내려 단골 이발소를 찾아가는 길에, 우산을 쓰고 가는
젊은 여자의 우산속을 막 뛰어들었을 때, 따뜻하게 받아주고는...
한참 침묵속을 거닐다 이발소로 뛰어갈 즈음, "안녕히 가세요" 라며
곱게, 깊숙이 절을 하던 묘령의 아가씨의 친절함이 나를 따뜻하게 한다.

아주 오래전, 사설도서관에서 모 시험준비에 들어간 첫 날 새벽.
책상에 엎드려 자고있는 나에게 살며시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시던
주인 아주머니의 인정이 나를 눈물나게 한다.

재학 자취시절 늦은 밤.
친구들이 술 마시고 쳐들어 와, "야! (한성아) 커피없어 커피!"하며
큰소리치고 떠드는 걸 듣고는, 뜨끈한 커피 여러잔을 들고 처음으로
내 방문을 노크했던, 지성과 미모를 겸한 옆방 독신녀의 파격적인
배려가 나를 기쁘게 한다.

85년 9월 동대구역.
조국순례대행진에 참가했던 팀원들을 만나 여관에서 하룻밤을 지새워야
할 때, 주인아저씨의 거듭 확인하는 염려를 불식하고 "괜찮아요"라고
대답하며, 꺼리낌 없이 우리(남학생 여러명)와 편안하게 한방에서 지새며
새근새근 잠속에 빠져들던 서울 여대생의 믿음 가득한 순결이 아름답게
내비친다.

적당한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여인들의 순수함과 인간적인 향내가 불현듯, 나를 기쁨과 아름다움의
이미지 속으로 끌어들이는 까닭은 뭘까?
그리움일까? ..
아니면 안톤시나크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대한 먹칠일까?
아직 가을 옷을 제대로 걸치지도 않았는데.. 참 걱정스럽다.

 

2004.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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