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언어

신접살림

신아나키스트 2009. 10. 5. 18:55

 

결혼을 앞둔 꿈꾸는 청년은 늘 행복했다.

그리고 자신만만했다.

결혼관에 대한 그의 철학과 의지는 진지하고 결연하다.

천편일률적인 화려함이나 분에 넘치는 자기 과시적인 신혼 생활보다는

나만의 색깔로 통속을 깨트리며 가장 아름답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길.

그 길..

청년이 꿈꾸던 아름다운 결혼의 출발선은 이랬다.

 

1. 양가 부모로부터 일체의 결혼지원금을 사양 할 것.

2. 결혼 날짜는 본인들이 정하며 형식에 치우친 폐백은 생략한다.

3. 양가에 예단,의복따위의 인사치례는 일체 생략하고 패물도 상징

  수준에 그칠것 (18K 1돈 가락지)

4. 울산에서 가장 허름하고 작은 쪽방에서 신접살림을 차릴것.(가장 중요한 포인트)

5. 최악의 환경에서 최고의 사랑을 창출한다.

 

그 청년은 술자리에서 친구들에게 이런말은 꺼내곤했다.

"곤로불에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여자라야 내 신부 될 자격이 있다"..

그럴때마다 친구들과 술집 마담들은 나를 비웃었다.

'어느 골빈 여자가 쪽방에서 석유 곤로불에 저녁거리를 라면으로 때우는

남자한테 시집가겠냐고.."

나는 또 그들 영혼의 가난함을 비웃는다.

후훗! 아니면 말구..."

 

그당시 나에게는 대학 때부터 6년간 사귀던 여자친구가 있었다.

남부럽지 않은 부잣집 장녀인 그녀는 나의 결혼관에 200% 호응해줬다.

텐트 생활이라도 기꺼이 따라올 각오가 돼 있기에 일단은 합격이다.

둘이서 결혼 날짜를 잡고 예식장을 예약하고 본격적으로 신혼방을 찾아 나섰다.

하루 이틀... 엿새..

없다.

울산에서 가장 초라하고 손바닥만한 골방은 어느 구석에도 없었다.

젤 허름한 방이 월세 10만원, 12만원선..(92년에 이정도면 형편없는 방이었슴)

가난한 독신자들이 기거하는 방들이었지만 나한텐 너무 화려했다.

새내기 부부를 무장시키기엔 너무 부르조아다.

 

일주일째 거리를 나섰다.

하이힐을 신은 예비신부의 뒷꿈치에 붙인 대일밴드에서 진물이 흘러내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했나?

나타났다.

드디어 내가 원하는 쪽방을 발견하고 만것이다.

크기는 두평, 월세는 7만원.

다세대 영세가구들만 모여사는 빗물 샐 것 같은 스레트집.

그리고 퐁당퐁당 똥물 튈 것 같은 재래식 공동 화장실 한 개...

"캬~ 바로 이거야"

신접살림의 프로젝트를 실행할 수 있는 멋진 공간.

딱 내가 찾은 그림 속의 그림이었다.

 

곧바로 계약금을 주고 다음날 착한여자와 손수 도배질을 했다.

룰루랄라 ♬

연탄아궁이를 사정없이 막아버리고 그 위에 곤로대신 후배들이 사온

가스렌지 하나를 얹었다.

모든 결혼 계획이 신속하고 철저하게 나의 의도대로 추진됐다.

어머니께서 왜 당신의 도움(경제적)을 안받으려 하느냐며 누나에게

울먹이며 나를 설득하려 해보지만 누구의 도움없이 알몸둥이 둘로만

시작하겠다는 나의 뜻을 꺽지는 못했다.

아직도 두사람 손에 끼워진 18k 한돈반지는 깊은 의미를 담아 내가 직접

디자인해서 보석상에 주문제작 의뢰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결혼식..

신혼 첫날밤은 평소 계획대로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소주한잔으로 시작했구,

둘째날은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님들한테 소주한잔을 올리며 시작했다.

7박8일의 버스여행을 마치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혼방에서

자지러지듯 행복한 나날을 보냈지만 달콤함을 시기한 도전들도 만만치 않았다.

곧바로 불어닥친 동장군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커텐을 걷으면 방 안쪽 유리창에 엉킨 결로가 얼음으로 변하는건 다반사.

방안이 영하로 내려가며 두사람의 입에서 허연 입김을 만들어 내지만

애초 냉방을 고집했던 신혼부부의 뜨거운 열기를 식히지는 못했다.

 

그러던 2월..

달빛마저 꽁꽁 얼어붙은 새벽.

팔 베개를하고 자는 나의 팔뚝에 차가운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영하의 추위를 잘 참아내던 아내가 한마디 불평도 하지 못하다가

눈물을 떨구는걸 봐 버렸다.

아~ 이게 무슨 잔인한 짓거리란 말인가.

이 무모한 행진에 왜 착한 아내가 희생이 되어야하나.

의도가 아무리 미래지향적이라 할지라도 아내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순

없잖은가.

마음을 고쳐 먹기로 했다.

이쯤하면 됐다구..

돈이 없어서 그런것도 아닌데..

사랑과 결혼생활에 대한 정신적 투자와 테스트의 기간을 앞당기자고 맘 먹었다.

 

애초 2년을 계획했던 지상최고의 신혼생활을 아내의 눈물로 인해 1년으로

줄이고 그 해 늦가을 이사를 했다.

강변 앞 신축건물 15평 단독주택..방 둘, 쬐그만 거실, 주방...ㅎㅎ

남들한테는 그저 그런 작은 전세집이였지만 우리한테는 그야말로 호텔이나

다름없었다.

주방 싱크대 위 수돗꼭지를 트니 뜨거운 물이 펑펑 쏟아진다.

믿기지 않은 뜨거운 물이..

아~ 사랑도 펑펑 눈물도 펑펑.. ♪

 

 

..........................................................

 

* 지금은 어떻게 사냐고?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 결혼18년차인 지금은 남들한테 미안할만큼

멋지게 살고 있거들랑요..ㅎ

무모한 프로젝트의 약효를 짱짱히 보는 셈 .. ^ ^

 

 

20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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