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해 전 이맘때 즈음 스와핑에 대한 화두가 술자리를 덮은 적이 있었다.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은밀한 스와핑 현장을 기습한 카메라는
전국의 안방을 강타하였고, 곧바로 발빠른 매스미디어의 상업주의와
고상한 여론은 하나가 되어 하늘을 뚫었다.
셀러리맨들의 술자리에 동원되는 안주들은 대개가 비숫했다.
"쳐죽일 놈들!. 짐승. 세상 말세야 말세. 사람 탈을 쓰고 어떻게.
힘없는 마누라가 자기 의지대로 그랬을까? " 등등....
대체로 이런 메뉴로 거품을 물던 그네들은 가끔씩
"스와핑을 위하여!" 하며 의미 심상한 술잔을 부딕치기도 한다.
이중적 잣대에 가슴을 엎어버린 순결한 그들은 이제 또 다른
배설을 할 채비를 한다.
책에 나온대로 노래방을 피해가지 못하는 정직한 발걸음들은
삐삐 아줌마까지 외면하지 않는다.
스와핑 대목에서 솜사탕 만큼 거품을 물었던 응큼한 친구는
어느새, 한 가정의 생계를 위해 전선으로 뛰어든 삐삐 아줌마의
궁둥이에 자신의 지체높은 막대기를 들이대느라 허리가 휘어진다.
주변을 휘둘러봐도 스와핑보다 이쁜 구석이 하나도 없다.
잠자리에서 아내에게 물어봤다.
"스와핑 어떻게 생각해? "
다행스럽게도 술자리에서 고상한척 하는 친구들보다 훨씬 건강하고
솔직하게 정리된 생각들을 쏟아내주었다.
나는 어느 여성주의 학자가 말한 " 스와핑은 여성의 성에 대한
이중잣대와 자본주의에 봉사하는 일부일처제에 대한 항거"라는
주장에 반박하고 싶지 않다.
스와핑 실천의 급진성보다는 이에 대한 한국사회의 사유가 너무 가난하고
상상력이 전무한게 더 우려스려울 뿐이다.
스와핑이 아니라 스와핑에 대한 해석이 내겐 더 위험스러워 보인다.
2006.9.12